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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5-03-25 (금)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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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도시 이야기
네 도시 이야기
한 창 훈

[숭실21]의 편집위원이신 곽금영 집사님 으로부터 원고청탁을 받고 우선 두려운 마음부터 앞섰다. 엉겁결에 수락은 하였으나 숭실교회에 다닌 지가 불과 10개월에 불과하고 믿음생활도 일천한 나였기에 교회창립 15주년을 맞이하여 발간하는 신성한 [숭실21]에 글을 싣는 자격 여부부터 고민을 하여야 했다. 그러나 편집위원님들 나름대로의 판단 하에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들은 물론 나 같은 초보자에게 까지도 원고를 골고루 배분하셨으리라는 이해 하에 용기를 갖고 쓰기로 마음 먹었다. 따라서 본인은 믿음이 일천한 자의 표본으로 글을 쓴다고 생각하니 만큼 여러 성도님들의 이해와 너그러운 아량으로 이 글을 읽어주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우선 나의 믿음생활은 내가 처음 미국유학길에 오른 1990년 여름 아름다운 테네시의 낙스빌에서 시작이 된다. 외국의 한인교회는 이국생활의 고독과 향수를 달래기 위한 한인들의 만남의 장소이자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곳이다. 주일날 한인들끼리 만나 한국말로 떠들며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지극히 소박한 이유에서는 물론, 그곳에서의 정착 및 사업 또는 취업에 관한 정보교류의 장으로서 80% 이상의 한인들이 그들이 과거 한국에서 가지고 있던 종교와는 상관없이 한인교회를 찾는다. 미국에 처음 도착하게 되면 아파트계약, 은행구좌개설, 운전면허취득, 차량구입, 우리의 주민등록증에 해당하는 Social security card신청, 그리고 심지어는 식탁, TV, 침대, 소파 등의 가재도구 구입에 이르기까지 초행자 혼자 힘으로는 감당하기가 힘든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바닥에 신문지 깔고 밥 먹고 온 가족이 담뇨 한 장으로 잠자리에 드는 흥부네 살림을 면하려면 한인교회로 가야 한다. 한인교회에는 초행자들을 위한 전담해결 팀(?)이 있어서 이들을 통하면 그야말로 만사가 형통이다. 특히 유학생들에게는 지도교수의 선정 및 학과목 선택 등의 중요한 정보들을 교회 선후배 간에 공유하므로(어쩐 일인지 교회가 다르면 잘 안 가르쳐 준다) 한인교회는 그야말로 명실공히 한인사회의 핵이라 할 수가 있다. 나와 아내도 상기의 이유에서 선배내외가 인도하는 한인교회에 자연스레 첫 발을 딛게 되었다.
한 2주쯤 지나자 여러 사람 들의 도움으로 모든 것이 안정되었고 그 무렵 목사님께서 내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목사님: 다음주에 심방을 가려 하는데요?
나: 네? 저희 신방(新房)에를요? (우린 그때 신혼이었다)
목사님: 아니, 신방이 아니라 심방요.
나: 네? 심방(心房)요? (그것은 내가 알고있던 유일한 심방의 뜻이었다 - 사람의 심장에 있는....)
목사님: 아니, 왜 그....신도들 방문하여 기도로 축복해 주는....(이민교회 목사님들의 애로사항을 알만도 하다)
나: 아, 그러니까.....목사님들의 가정방문 같은 거군요?
우리 내외는 열심히 심방(尋訪)준비를 하였다. 나는 열심히 청소를 하고 아내는 다과를 정성으로 준비하였다. 때는 한여름이라 무척 더웠고 심방오신 목사님과 두 분의 집사님들은 땀에 흠뻑 젖어서 들어오셨다.
나: 목사님, 더우신데 우선 시원한 맥주부터 내올까요? (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죄의식의 소름이 끼쳐진다)
목사님: .......................
집사 A: 있으면 좀 주시지요.
집사 B: 그래요, 우선 마시고 땀부터 식힙시다. (그 집사님들도 나보다 별로 나은 믿음의 소유자들이 아니었나 보다)
나: 목사님께선?
목사님: (머뭇거리시며) 난, 운전 때문에..... (이민교회 목사님들의 애로사항을 알만도 하다)
나: ???
그리하여 때아닌 맥주파티가 벌어지고... 내가 그 당시의 실수를 깨닫기까지는 거의 1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렇게 나의 믿음생활은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도움으로 정착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해결된 후 나의 교회출석은 뜸해졌다. 아쉬움을 해결한 나에게 교회는 더 이상 사막의 오아시스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한 달에 한번, 계절에 한번, 크리스마스, 그리고 부활절......그런 식이었다. 한번은 부활절 예배에 참석을 하고 친교의 시간을 갖는 도중, 지난 크리스마스 때의 산타 할아버지를 기억한 우리 큰애가 ‘산타 할아버지 어디 갔어요?’ 하고 묻는 바람에 주위 분들이 폭소를 터뜨렸던 기억이 난다. 자식 덕에 나는 얼굴이 붉어지고......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나의 믿음은 여전히 초심(?)에 머물러 있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학위를 마치고 아틀란타에 있는 에모리 의대로 박사 후 과정을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무척이나 자유로왔다. 교회에 안 나가도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었고, 이미 미국생활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초보자들의 요청이 귀찮을 따름이었다. 따라서 낙스빌과 아틀란타에서의 내 믿음생활은 ‘시작’에 의미를 부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디 가서 누가 내 종교를 물으면 기독교라고 대답 하였으니 분명 ‘시작’은 한 것이리라. (그들은 내 믿음의 ‘깊이’에는 관심이 없었다)
기고만장하던 나에게 서서히 위기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였는데 3년의 박사후 과정이 만료되고 나의 진로가 불투명하여 진 것이다. 한국에서는 IMF 이후 대학교의 교수자리 얻기가 힘들어지고 미국 내에서는 1999년에 Y2K 문제해결을 위하여 인도에서 IT관련 기술자들을 대거 수입하는 바람에 미국내의 ‘99년 취업비자가 완전 바닥이 나 버린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 가족은 제3국 행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때 나는 내 식솔들의 앞날을 위하여 하나님께 처음으로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나와 내 가족을 살려주시면.....”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선 나의 기도를 기꺼이 들어 주셨고 나는 스위스 쮜리히 공대의 연구교수로 고액연봉을 받고 가게 되었다.
우리 가족의 스위스생활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쮜리히에 있는 작은 한인교회를 찾아 주일마다 예배를 나갔다. 나의 주일성수는 내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대한 나의 크나큰 선심이었다. 또한 그 곳에서의 한인교회는 나의 정착에 있어서 또 다른 교두보였을 뿐이었고. 그러한 마음자세에서 내 신앙은 여전히 초입의 언저리를 맴돌 뿐이었다. 그러던 나의 신앙생활에 작은 변화가 생겼는데 내가 매주 수요일마다의 성경공부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수요 성경공부의 장소는 내가 근무하던 쮜리히 공대 근처 교회였고 수요일 퇴근 시 그곳을 지나서 집으로 향할 때마다 나는 약간의 죄의식을 느꼈었다. 또한 베른에 사시는 목사님께서 수요일 저녁마다 쮜리히 까지 기차로 한시간 거리를 오시면서 빵으로 저녁을 해결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나는 목사님께 매주 수요일 저녁식사를 대접하기로 마음먹었다. 목사님께서는 시사에 밝으시고 역사와 세계사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분이셨으며 대화수준을 내 눈높이에 맞추어 주셔서 나는 그 분과 식사를 하며 갖는 대화의 시간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그러다 보니 나는 자연스레 수요 성경공부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때 깨우친 성경의 각 구절들은 내 생활의 지침이 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생활하기를 만 2년. 내가 한국 행을 결심하자 목사님께서는 무척이나 아쉬워 하시며 우리 가정을 위하여 기도하여 주셨고 서울 가서도 신앙생활에 충실하라는 충고도 잊지 않으셨다.
서울에 돌아오자 나는 목사님과의 굳은 약속을 깨고 주일날을 잊고 만다. 12년 만에 보는 친구들, 친척들, 그리운 얼굴들을 만나 한잔 기울이다 보면 일요일 아침엔 늦잠을 자기가 일쑤였다. 다행히 신앙심이 나보다 조금은 깊은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채비를 하고 깨워도 내 몸은 천근만근 이었다. 숭실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의 아우가 숭실교회를 추천하여 주었고,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숭실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시간에 나는 달콤한 꿈나라를 헤메고... 지나고 보니 나는 다른 곳으로의 이주 때마다 교회로부터 멀어졌던 셈이 된다. 적어도 나에게 어떤 고난이나 고민이 생겨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까지는...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나에게 기도의 기회를 주신다. 여기서 잠깐 나는 우리집안, 아니 나의 부끄러운 역사에 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십 수년 전 나의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난후 아버님이 하시던 사업체를 가운데 놓고 나는 집안의 친척어른과 재산싸움을 하였다. 결국 모든 것은 그 분께로 돌아가고 맨손으로 남은 나는 결혼과 함께 미국유학을 결심하였다. 그것이 돈 없이 할 수 있는 나의 유일한 선택이었으므로. ‘누가 잘되나 보자’ 식의 치졸한 복수심을 가슴에 품고서. 몇 번의 국제전화 상에서 오고 간 막말과 서로에 대한 저주. 가끔 나의 한국방문 시 친척모임에서 나는 그 분께 불손하였고 그분은 냉소적이셨다. 아버님 살아생전시 화목을 자랑하였던 우리집안은 우리 둘의 불편한 관계로 인하여 서먹해지고 어쩌다 모여도 모두들 우리 두 사람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그런데 어쩌랴 막상 영구귀국하고 난후 나는 그분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심이 나의 관심사에서 한참 멀어져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래선 안 되는데.... 마음을 다잡아 보았지만 한번 꺼진 증오의 불씨들은 다시 피어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께 나의 고민(?)을 털어놓았고 어머니께서는 내게 ‘용서’를 가르치셨다. 나는 아버님 산소를 찾아 뵙고 그 동안 어른에 대한 나의 불손함을 용서 받기로 결심하였다. 그 어른을 만나러 가는 차 안에서 나는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다. ‘재산싸움이 있기 이전에 좋았던 우리의 관계를 다시 돌려주옵소서’ 라고. 우리는 찻집에서 마주앉았고 나의 사죄 앞에 그분은 잠시 당황하는 눈치셨다. 아마도 또 재산 얘기를 하러 온 줄 아셨나 보다. 나는 진정으로 그 분께 용서를 빌었고 하나님께서는 적어도 그 순간 나와 함께 하셨다. 나의 진심을 확인하신 그 분께서는 마침내 마음의 문을 여셨고 우린 손을 뜨겁게 마주잡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과 함께 지난 십 수년간 쌓여있던 증오심도 함께 녹아 내렸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 ‘저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나는 다시 교회에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주일날 채비를 하는 아내에게 같이 가자고 하였더니 아내는 몹씨 기뻐하였다. 숭실교회는 우리가 다녔던 외국의 이민교회들에 비하여 그 규모나 신도수가 훨씬 크고 많았다. 곳곳에 많은 자원 봉사자들의 활동이 눈에 띄었고 쮜리히 한인교회 전체인원 만큼이나 되는 성가대의 규모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숭실교회에 반한 이유는 현순호목사님의 설교내용과 열린 성품 때문이었다. 현목사님 덕분에 나는 매주 소중한 보물들을 마음에 품고 돌아와 속세에서의 한 주간을 은혜롭게 생활할 수가 있었다.
나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한가지 컴플렉스를 안고 살았는데, 다름아닌 나의 기도 습관 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늘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건만 그 고비를 넘기면 나는 비겁하게도 신앙에서 멀어졌었다. 마치 내 능력으로 고비를 넘긴 양 그리고 편안해진 현실은 당연히 나의 소유인 양. 따라서 나의 신앙은 철저히 내 위주의 이기주의적 신앙이요 ‘나의 복을 비는’ 기복 신앙일 수밖에 없었다. 대학시절 나는 임어당의 글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그의 글에서 기복신앙의 딜레마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여기 각각 동쪽으로 항해하는 선박과 서쪽으로 항해하는 2개의 선박이 있다고 치자. 선원들이 각각의 배에서 ‘순풍’을 기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기도를 들어 주셔야 하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신앙도를 저울질 하실까, 아니면....? 이라고 묘사 하고 있다. 그 글이 아직까지도 뇌리에 남아있던 나로서는 만약 내가 ‘나의 복’을 기원한다면 나와 경쟁하는 자 또는 나와 뜻을 달리하는 자들의 기도는 어디로 가야하나? 이러한 고민을 계속하다 보니 나는 자연스레 기도에 인색 하여졌고 기도를 하여도 나와 반대편으로 가고자 하는 이들에 대한 죄의식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나는 현목사님의 설교에서 답을 얻는다. 미국의 남북전쟁 중 에이브라함 링컨이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는 ‘지금 제가 하고있는 전쟁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전쟁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라는 기도였다고 말씀하여 주셨다. “그래 바로 그거야!!!” 비록 전쟁에서 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가는 마음. 따라서 내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기도는 ‘내 삶의 방향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방향이 되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이리라. 나는 이제부터 나와 상반된 다른 이에 대한 죄의식 없이 기도할 수 있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나는 지금 내가 쓰는 글의 원고청탁을 받던 당일 날 현목사님의 설교에서 보다 구체적인 답을 얻는다.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기도는 ‘만약 예수님께서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기도하셨을까?’라고 자문하여 본 후에 올려야 한다고 말씀하여 주셨다. 목사님의 설교 도중에 나는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 눈물은 참 진리를 깨우친 희열의 눈물이었다. 이제부터 나는 매사를 앞두고 자유롭고 떳떳하게 기도할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셨다면 이 상황에서 어떠한 기도를 하셨을까?’를 먼저 자문하여 본 후에.
서양사 (특히 예술사)를 기술할 때 어떤 이는 ‘헬레니즘과 히브리즘의 시이소타기‘ 라는 표현들을 쓴다. 다시 말해서 종교가 인간사를 너무 속박할 경우 인간의 속내를 여과 없이 털어놓는 헬레니즘이 고개를 들고, 인간의 세상이 무질서하게 타락하였을 경우 올바른 가르침을 위하여 히브리즘이 고개를 든다는 논리이다. 서울에 오기 전 3개 도시를 방랑하며 나의 신앙은 아마도 ’헬레니즘과 히브리즘의 시이소‘를 타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내가 한국에 영구귀국 하였듯이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이제는 영구히 정착하고 싶다. 서울에 살고있는 지금 밤에 보이는 무수한 교회의 십자가들 사이로 또한 무수히 많은 술집의 네온사인 들을 보면서 나는 오늘날 우리들이 헬레니즘과 히브리즘이 공존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않나 하는 생각을 하여 본다. 심지어는 개개인들(나 자신을 포함한)의 생활조차도 하루에도 몇 번씩 금과 욕을 넘나들며 살고있으니. 두려운 마음도 조금은 들지만, 나에겐 ’기도‘라는 크나큰 무기가 있지 않은가. 주일날 교회에서 나의 죄를 씻은 후 세속의 먼지 속으로 떠나기 전에 나는 요즈음 다음과 같은 기도를 올린다. 바로 내가 좋아하는 찬송 59장의 내용으로.

성전을 떠나 가기 전/ 고개를 숙일 때/ 주께서 함께 계시고/ 복 내려 주소서

집으로 돌아 가는 길/ 주 동행 하시고/ 내 모든 언행 심사를/ 다 지켜 주소서

거룩한 날이 다 가고/ 저녁이 되도록/ 주 우리 맘에 빛 되사/ 늘 계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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