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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1-01-14 (금) 06:50
ㆍ추천: 0  ㆍ조회: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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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있는 첫계명(에베소서 6:1-3)
                   약속있는 첫계명(에베소서 6:1-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계명이니,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언젠가 한국에서 성공적인 목회활동을 하시다가 은퇴하신 한
원로목사님 내외분을 위해서 스위스 관광안내를 해드린적이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목회자로서 뿐 아니라 신학자로서도 제자양성을
위해서 오랜 세월 애쓰신 분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목사님 내외분은 딸만 다섯을 낳아, 아들 가진 사람
부럽지않게 잘 기르신 훌륭한  부모이기도 하셨습니다.
짧은 이삼일간이었지만 함께 지내보니 너무도 존경이 되어지는
훌륭한 목사님이시었습니다.

자동차운전을 못하는 필자는 주로 기차로 이동을 하는데, 자동차
가진 사람보다는 기동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기차안에서
얼마든지 책도 읽고, 신문도 읽고, 설교준비도 할 수 있고, 그리고
기도까지도 할 수 있어, 여러모로 유익한 점이 많습니다.
단점이라면 모처럼 손님이 오시게되면 손님을 위한 기차표를
따로 사야하기 때문에 한가지 단점이 되어집니다.
그러기에  손님접대를 위해 관광안내를 해드릴 때에도 경제적인
측면을 고려해 통상 필자가 사는 800미터 산동네인 슈바르첸부르그
(Schwarzenburg)와, 집에서 가까운 세계 십대 문화유산중의 하나인
베른시(Bern)의 구시가지(Altstadt)의 관광을 위해서 하루, 그리고
툰호수(Thuner See)에서의 선상유람과, 3500미터 높이까지 오르는
융프라우(Jungfraujoch) 산악열차 관광을 위해서 또 하루를 잡습니다.
이것이 다입니다.

이 한국의 원로목사님 내외분을 위해서는 둘째날 관광지를 목사님
내외분의 요청에 따라  툰호수와 융프라우로 정하지않고,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의 활동무대였든 제네바(Geneva)로 정하여 함께 칼빈의
유적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도중에 기차안에서 한국인 신혼부부를 만나게되어
우리는 기차안에서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분들은 체코에서 오는 길이었는데, 오는 도중에 모든 소지품을 다
잃어버려 우리가 처음 그분들을 보았을 때 그분들의 표정이 매우
어두운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들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일부러 우스게소리를
많이 했습니다.
어느정도 기분전환이 되어진후 그분들의 밝아진 얼굴을 보니, 두분다
성품이 참 좋아보였고, 무었보다 너무도 잘 어울려보였습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 두분을 하루저녁 필자의 집에서 재워드리게 되었는데
대화의 주제들은 자연스럽게 신앙에 관해서, 삶에 관해서, 가정생활에
관해서 그리고 부모공경에 관해서로 옮겨갔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부부싸움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는데, 종종 부부싸움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들의 상담을 해드렸든 필자는 두분에게 이런
말씀을 해드렸습니다.
„두분, 사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은 서로 용서하는 것이고, 사랑은 서로 져주는 것입니다.
두분, 앞으로 함게 살아가시면서 서로 용서하면서, 서로 져주면서
살아가십시요. 그러면 틀림없이 행복하게 잘 사실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 연노하신 목사님이 곁에서 들으시고, „김목사님의 말씀은
체험속에서 얻어진 산 교훈입니다. 마음에 잘 새겨두십시요!“라고
함께 거들었습니다.

용서하고 져준다는 것은 여간 노력하지 않고서는 아주어렵습니다.
그러다보니 끝내 함께 살지못하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비록 결혼식은
올렸지만 혼인신고를 최대한 뒤로 미루는 그런 신혼부부들이 많아
졌다고 합니다.
비록 서로 사랑을 하면서도 실제로 함께 가정을 지켜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
요즘 한국에서의 신혼부부가운데 삼분의 일이 삼년이내에 이혼한다고
합니다. 이혼에 이르게되는데는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대부분 성격
차이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이 성격차이로 인한 갈등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양보하고
타협하면서, 서로를 품으려고하는 노력이 부족한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서로 쉽게 용서하고, 쉽게 져줄 수만 있다면 그렇게 쉽게 갈라서지않아도
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무조건적이라 할만큼 쉽게 용서하고 쉽게 져주는 사랑이 있습니다.
바로 부모의 자식사랑입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15장에 집을 나간 탕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탕자는
아버지를 졸라 일찌감치 재산상속을 받아 현금으로 만든뒤  먼나라로 갑니다.
그러나 그는 철없는 아들이었고, 세상물정을 모르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방탕한 친구들을 사귀며, 술과 여자와 오락으로 가진 돈을
탕진해버리고 맙니다. 그런다음 그는 누더기를 걸치고 구걸을 하고다니는
거지가 되어집니다.
하지만 그는 구걸로 허기진 배를 다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는 결국 염치불구하고 먼길을 걸어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왜, 아버지는 철없는 아들이 잘못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 아들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그런데 우리 속담에 „자식이기는 부모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착심 때문에 허다한 경우 무모는 자식의 뜻을
꺽지 못합니다.
그랬다가 자식을 잃거나, 자식이 잘못되어지지 않을까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거의 모든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는 이렇게 나약합니다.
대개의 경우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을 잃지않기 위해, 그리고
끝까지 자식의 적절한 보호자가 되기위해 자식에게 져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낳은 자식 자기가 못가르친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식이 잘못되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비난을 받고, 욕을 먹게 될 때에도
부모만은 그래도  이런 자식을 이해해주려고 하고, 대신 돌을 맞으려고 합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에서 보여지듯, 부모는 자식이 용서를 빌기 이전에 자식을
용서해 버리고, 마치 자식이 아무런 잘못을 범하지않은 것처럼 자식을 대합니다.
그래서 부모의 자식사랑은 본능적이요, 무조건적입니다.
이같은 부모의 자식사랑은 스스로 부모가 되어 자식을 길러보게 될 때에야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노란색은 용서와 화해의 상징입니다. 그래서인지 <노란 손수건>에 관한 이야기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언젠가  리더스 다이제스트(The Readers’ Digest)에 실렸든 내용입니다.

광활한 미국대륙을 횡단하는 버스에 젊은이들이 가득히 타고서 즐겁게 웃고 떠들며
가고 있는데, 중서부의 한 정거장에서 남루한 옷차림을 한 청년이 버스에 올라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유쾌히 웃고 떠들며 이야기하는 다른 청년들과는 달리,
버스 한구석에 자리를 잡은후 수심에 가득찬 얼굴로 단지 차창밖만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버스에 있던 젊은이들은 이러한 그가 안스러워보여, 그에게  커피며 먹을 것을 나누어주며
일부러 말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마음이 열린 이 청년은 자신의  지닌 사연을 털어놓았습니다.
청년은 고등학교 때 집에 있는 돈을 다 훔쳐서 무작정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먼곳에가서 금세 돈을 탕진한 청년은 그뒤 먹고 살기 위해 온갖 일을
다하다가 마침내 도둑질까지 하고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은 감옥살이를  하는동안 자신의 지난날의 잘못된 행실을 깊이 뉘우치며,
마침내 아버지에게 용서를 비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그 편지에 자신이 정말 잘못했으니,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그의 아버지에게 애절하게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지은 죄가 있으니 설령 용서해주지 않아도 원망하지는 않겠다고
했습니다.
다만 자기가 출옥하는 날 바로 고속버스를 타면 오후 몇시쯤에 동네앞 버스정류장을
지나게 될터인데, 만약 아버지가 자기를 용서하고 받아준다면, 그 정거장앞에 있는
은행나무 가지에 노란 손수건 하나를 걸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면 내려서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렇지않으면 버스를 타고 멀리멀리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추호도 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사연을 들은 버스안의 청년들은 일순간 술렁대기 시작했습니다.
잠시후면 버스가 이 청년이 이전에 살던 고향에 당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버스가 이 청년의 고향마을에 들어서자, 버스안의 청년들은 일제히 얼굴을 차창에
대고 문제의 은행나무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청년은 너무도 두렵고 떨려 감히 밖을 내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습니다.
버스가 서서히 커브를 돌면서 버스정류장 표지와 함께 문제의 은행나무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순간 버스안의 모든 젊은이들이 휘바람을 불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리고는 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청년을 일으켜세워 밖을 내다보게 했습니다.
밖을 보니 은행나무 가지마다  노란 손수건이 몇개씩 묶여있어 은행나무 전체가
노란 잎으로 출렁이는듯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그 앞에 웬 노신사가 엄청나게 큰 노란 깃발을
들고, 버스를 향해 힘차게 흔들고 있엇습니다.
바로 이 청년의 아버지였습니다.
청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던 버스안의
다른 청년들의 눈도 젖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버스가 멈추자 이 청년은 버스에서 내려 다른 청년들의 우뢰같은 박수를
받으며 그의 아버지에게로 다가갔습니다.
이윽고 버스는 다시 출발했고, 버스안의 청년들은 서로 꼭 껴앉고 울고있는
두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부모의 자식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부모의 자식사랑에는 이해타산이 없습니다.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입니다.
그러나 자식들의 눈에 비쳐지는 부모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설문조사에 의할 것 같으면 한국 청소년들가운데  75퍼센트가 „나는 우리 부모처럼
되고싶지 않다“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상당히 많은 청소년들이 부모를 필요로 하면서도 부모를 혐오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릴때의 부모는 어린아이에게 하나님같은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한마디로 최고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부모의 결함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눈에 보여지는
이러한 부모의 결함들은 청소년에게는 심각한 고민거리가 되어집니다.
나의 부모도 여늬 사람들처럼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않기 때문입니다.
허다히 많은 청소년들이 부모의 결함과 부모의 단점들때문에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고민하며 갈등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래도 자식에게 만은 좋은 부모가 되어주기 위해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자식사랑은 이처럼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데, 너희를 낳아기른 친부모처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러면 부모는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육체를 창조하셨다면, 우리의 부모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낳아주신 제2의
창조주 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부모가 비록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온전한 존재는 아닐찌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를 낳아주시고, 우리를 길러주신 부모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결코 용납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 잘하려고 하듯 부모에게도 잘 해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해주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부모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를 낳아주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내가 이세상에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모는 제2의 창조주 이십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통치원리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복을 받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은 화를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지켜나가야 할 규례와 법도로서 <십계명>
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첫번째가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이고 두번째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모공경>을 성경 본문말씀은 <약속있는 첫계명>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도리입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조건도 갖다 댈  필요가 없습니다.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모공경에 관한 계율은 인간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이웃사랑은 가정에서 부터 실천되어져야 합니다. 한 지붕아래
살아가는 가족들끼리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의 자식사랑은 본능적입니다. 하지만 자식의 부모공경은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공경은 진정한 이웃사랑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서 부모공경의 도리를  다하는 사람에게  비로소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약속있는 첫계명인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공경은 어떻게 행해져야 합니까? 본문 말씀은 이에관한 간단한 원칙을
제시해 줍니다.

첫째로 부모공경은 주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1절).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공경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무슨 뜻입니까?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공경하라는 이 말은 주님을 공경하듯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부모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즈음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모든 권위를 부정하는 시대사조를 칭하는 말입니다.
특별히 <포스트모더니즘>은 전 세계적으로 신학계(神學界)와 교육계(敎育界)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 사상의 특징은 기존의 권위(Established Authority)를 타파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말씀의 권위도, 부모의 권위도, 국가의 권위도, 집권자의 권위도 대등한 입장에서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근래 한국에서 젊은 사제들이 주축이 된 <정의구현 사제단>이라는 카톨릭의 단체가
예민한 정치문제를 가지고 <추기경>과 첨예하게 대립을 하면서 급기야는 젊은 사제들이
<추기경>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서기까지 했습니다.
권위와 서열을 중시하는 카톨릭교회의 속성으로 봐서 매우 이례적인 행동입니다.
우발적이라고 보기보다는 젊은 사제들이 신학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이 새로운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봐야 될 것입니다.
이 사상이 신학계(神學界)에 얼마나 깊숙히 뿌리내렸는가를 엿보게하는 한 사건이
스위스에서 있었습니다.
스위스의 한 목사님이 책을 썼는데 책의 제목이 „하나님, 당신이 틀렸습니다“ 였습니다.
성경의 오류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조치들이
잘못되었다고 하나님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전교조(全敎組)>활동도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지않았나 생각되어 집니다. 그래서 사사건건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며
마찰을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또 다른 특징은 자율적 판단(自律的判斷)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획일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전교조의 교육정책과, 전통적인 기존 교육정책사이에 충돌과 대립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교조의 교육정책은 자율적학습(自律的學習)을 강조하는 반면
기존 교육개념은 학생 한사람, 한사람을 경쟁력있는 사회의 일원으로 만들어가는
책임교육을 강조합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고(思考)가 하나의 시대의 흐름으로
받아들여져, 특별히 교육분야에 두드러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럽에서는 청소년들이 만 18세가 되면 성인으로 인정합니다. 이때부터는 학교도
만 18세가 되어진 학생들의 학교교육에 관해서 더이상 부모와 상의하지 않습니다.
물론 학업성취도 여부에 관해서도 부모에게는 더이상 통보되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부모의 권리는 없어지고, 부모의 책임과 의무만 남게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독일 에르푸르트(Erfurt)에서 성적부진으로 퇴학당한 한 고등학생이 학교에서
퇴학당한 6개월 후, 학교에 총을 가지고 들어가  열여섯명을 쏴죽인 끔찍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중 열네명이 이 학생을 가르쳤던 교사들이었습니다.
그일이 생길때 까지 이 학생의 부모는 자기네 아이가 학교에서 퇴학처분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일이 있은후 취리히(Zürich) 인근에서 <목회자 세미나>가 있엇는데, 이 세미나에는
세계각지로 부터 수백명의 신학자와, 목사와, 선교사들이 참석했습니다.
이때 독일 베를린(Berlin)에서 온 한 신학자는 그때 일을 상기시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학교가 학부모들의 권리를 인정해서 이 학생이 6개월전 퇴학을 당했을 때,
집으로 통보해 주기만 했드래도 부모는 그 어떤 대책을 세웠을텐데,  전혀 부모에게
알리지 않아 결국 이런 재앙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고는 비성경적이며, 윤리적으로도 결함이 많습니다.

둘째로 부모공경은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공경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듯,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의 뜻에 순종해야함도 명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옳으니라!“
이 부모공경의 도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마땅히 지켜나가야 할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러기에 부모를 멸시하고, 부모를 외면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결코 축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통치원리가운데 <인과응보의 법칙>이 있습니다.
심은데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데로 되돌려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를 업신여기고 외면하면, 내가 낳은 자식도 나를 업신여기고
외면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필규정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원리가 그대로 적용되어지는 것입니다.

필자가 경기도 안양시 평촌동에 첫발을 디딘 것이 1970년 2월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이곳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이곳에서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는
은혜를 체험했으며, 이곳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하여, 스위스로 올때까지 10년간 신학공부와,
목회와, 선교활동을 병행했습니다.
지금이야 평촌동일대가 평촌신도시(坪村新都市)라는 거대한 초현대식 도시로 변모되어
있지만, 그때만해도 평촌동 일대는 낙후된 농촌지역으로, 음(陰)씨들이 많이 모여사는
음씨 집성촌(陰氏集成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포장도로도, 다리도 없었기 때문에 비가 조금만 많이와도 물이 불어난
하천을 건너지못해 버스가  끊기기 일수였습니다.
이 지역이 새로운 공장지대로 개발되면서, 포장도로도 생기고, 다리도, 현대식 건물들도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만,
필자가 스위스로 올때까지만 해도 평촌동 일대는 여전히 농촌과 도시가 혼재하는 그런
지역이었습니다.
필자가 스위스로 올무렵까지 필자는 필자의 가족들(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이층으로
된 다새대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이 다새대주택 옆에는 다 쓰러져가는 작은 초가집
한채가 있었고, 이집에는 일흔다섯 정도 되어보이는 할머니가 혼자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며느리가 안양시에서 문방구점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한번도 찾아오는
것을 본적은 없었습니다.
동네 음씨들이 이 할머니의 친척이라는 말도 듣기는 했습니다만, 이 할머니가 그들과
왕래하는 것도 전혀 보지를 못했습니다.
참으로 외롭게 살아가는 할머니였는데, 성격또한 괴팍하고, 싸나워 동네사람 그 누구도
이 할머니에게 말을 붙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해 겨울들어 이 할머니는 소대변을 가리지못해, 온몸에 악취를 풍기며, 벗은
발로 온 동네를 헤메고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동네 사람들은 이제 이 노인네가 마침네 죽을 때가 되었나보다는 반응들을
보였습니다만, 그 누구도 이 할머니를 돕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결국 필자의 가족들이 이 할머니를 돌보게 되었는데, 필자의 어머니는 때마다 밥을 지어다
먹였고, 필자의 동생은 더러워진 몸을 씻겨드리고, 깨끗한 의복으로 갈아입히는
일을 했으며, 필자는 땔감을 구해다 아침저녁으로 불을 때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같은 행동에 대해  의외로 동네주민들은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냥 죽게 놔두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상보다 이 할머니를 돌보아드리는 기간이 길어져,
이 할머니의 며느리를 수소문해 찾아가 사연을 말했드니, 며느리되는 사람 역시, 그냥
죽게 놔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사람으로서 할 도리는 아니지 않느냐고 했드니,
그렇게 생각한다면 차라리 자기를 감옥으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비록 시어머니 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책임지지는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필자의 가족들이 이 할머니를  돌아가실 때 까지 돌보아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왜, 친척이라는 동네사람들이 이 할머니에 대해서 그토록 냉담했는가를
알게 되어졌습니다.
이 할머니가 이 시골동네로 시집왔을 무렵, 시집은 그래도 농촌사람치고는 꽤 넉넉한
편에 속했다고 합니다.
당시 시어머니는 외동아들 하나만을 바라보고 공들여 길렀는데, 막상 장가를 들이고
나니 며느리의 괄시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하얀 쌀밥을 해도 남편과 자식들에게만 주고, 생선, 고기반찬을 해도 남편과 자식들
에게만 줍니다.
이 시어머니의 속앓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몸져누워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드니, 언젠가 부터는 소대변도 못가리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며느리는 똥오줌 못가린다고, 음식량을 죽지않을 만큼만으로 줄였습니다.
비록 몸은 병들어 거동이 불편하지만, 너무도 배가 고픈 이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집을
비울때면  방문을 열고, 지나가는 동네사람들에게 음식을 구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이 가져다 준 음식을 먹고나면 반드시 대변의 양이 많아지기 때문에, 부화가
치민 이 며느리는 담장밖으로 나가, 어떤년이 우리 시어머니에게 음식을 갖다
주었느냐고 욕을 바락바락 했다고 합니다.
결국 이 시어머니가 죽게 되는데, 이 시어머니는 죽기전에 이 사악한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두고봐라, 네년도 꼭 나처럼 고생하다 죽을 것이다.“
이 시어머니가 돌아가신후 이 며느리는 이제야 남편이랑, 자식들이랑 재미나게
살아보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후 남편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렸고, 대학까지 가르친
두 아들 일찍 장가들였더니, 차례로 병들어 죽어버렸습니다.
그 과정속에서 그 많던 전답은 남편과 두 아들의 치료비로 날아가버리고, 남은 것은
맨몸 뿐이었습니다.
결국 두 며느리 역시 짐을 싸서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의 삶은 하루하루 겨우 연명해 나가는 가난과 궁핍의 연속이었고,
그 누구도 상대해주는 사람이 없는 참으로 외롭고, 외로운 삶이었습니다.
필자가 이곳 스위스로 온 후에도 필자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지속적으로 이 할머니를
보살펴 드렸는데, 어느날 갑짜기 이 할머니가 행방불명이 되어버렸습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동네 외진 길에서 지나가는 트럭에 치어 죽었는데, 트럭운전사는
이 할머니의 시체를 재빨리 트럭에 실고서 어디론가 가버렸다고 합니다.

부모공경은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그러기에 부모를 멸시하고, 부모를 외면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결코 축복하지 않으십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 이런 구절이 나와 있습니다.
„효도(孝道)하고 순(順)한 사람은 효도하고 순한 자식을 낳을 것이며, 오역(傲逆)한
사람은 오역한 자식을 낳을 것이다. 믿지 못하겠거든 저 처마끝의 낙수(落水)를
보아라. 방울방울 떨어져 내림이 어긋남이 없느니라.“

셋째로 부모공경은 축복의 근거입니다(3절).

„이는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하나님께서 부모공경 할줄 아는 사람에게 두가지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먼저 만사가 형통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행사를 주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장수의 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건강하게, 평안하게, 그리고 오래오래
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부모공경은 약속있는 첫계명입니다. 부모공경 잘하면 장수의 복이 따르고, 부모공경
잘하면 물질의 복이 따르며, 부모공경 잘하면 건강의 복이 따름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누린 축복이었고, 이삭이 누린 축복이었으며, 야곱이
누린 축복이었고, 그의 아들 요셉이 누린 축복이엇습니다.
동일하게 이복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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