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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3-08-04 (일)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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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 삶의 기쁨(전도서 2:24-26)
삶의 의미 삶의 기쁨(전도서 2:24-26)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 심령에 낙을 누리는 것 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사람을 가리켜서 생각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탁월한 존재요, 만물의 영장인 사람에게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사중의 하나가 바로 이 생각하는 기능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쉽게 이해되어지는 말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매우 깊은 의미가 담긴 철학적 표현입니다.

하지만 굳이 철학자가 아니래도 사람은 누구나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많이 생각합니다.
구약성경 전도서의 말씀은 삶의 의미, 삶의 가치에 대한 답을 얻기위한 이 사색적 탐구가 곧 지혜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철학은 이 지혜를 얻기위해 사색하며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철학을 영어로 필로소피 (Philosophy)라고 하는데 그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필로소피아 (φιλοσοφία)입니다.
필로는 ‘사랑하다’ ‘좋아하다’라는 뜻의 접두사이고 소피아는 <지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철학 곧 필로소피는 사색적 지혜를
사랑하는 <애지(愛知)의 학문>입니다.
원래 철학은 삶의 의미와 삶의 가치에 대한 지혜를 얻기위해 사색하며 탐구하는 학문이지만 현대철학은 언젠가부터 방향감각을
잃고 혼돈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염세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 ~1860 )>는 이같은 혼돈의 철학의 선두주자였습니다.
쇼펜하우어를 가리켜 일명 <자살선동꾼>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철학사상은 그만큼 비관적이며 현실도피적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삶은 고통이며 고통의 원인은 욕망이다. 그래서 이 갈망이 끝날 때 고통도 멈춘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지극히 불교적 표현입니다. 실제로 그의 철학사상은 흰두교와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쇼펜하우어의 이같은 철학사상은 그의 뒤를 이은 니체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그야말로 지난 한세기의 철학계를 뒤흔들어놓은 인물입니다.
그의 철학사상의 특징은 성경에 근거한 서양의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부정과 허무주의(Nihilism)입니다.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목사였던 니체의 가문이었지만 그의 성향은 철저히 반기독교적이었고 심지어 그는
<기독교에의 저주-Der Antichrist; Fluch auf das Christentum, 1888>라는 책을 저술하여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니체는 기독교에 입각한 기존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부정하고 무신론에 입각한 새로운 가치체계의 정립을 위해 애를 많이 썼지만,
스스로에게 던진 새로운 질문들에 대한 완벽한 답을 찾을 수 없었던 그는 내적 혼란으로 인해 정신분열증환자가 되어버렸고,
저술활동과 정신병치료와 무단가출을 되풀이하던 그는 어느날 광인이 되어 길거리를 헤매다가 쓰러져 죽고맙니다.
기독교진리의 완전성과 절대성을 부정하고 기독교밖에서 새로운 완전한 진리를 찾아 내고자 했든 니체는 그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atra,1883>에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해버립니다.
니체의 이같은 사상적 방황은 지난 100년간 세속주의 철학자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고, 절대적 진리, 절대적 가치관을
부정하는 21세기의 신사조인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의 모태가 되어졌습니다.

19세기 유럽의 철학자들이 기존의 기독교적 관념, 기독교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삶과 가치관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해석을
시도하려고 했던 것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사회환경의 급격한 변화때문이었습니다.
그당시까지만 해도 농경사회에 불과했던 유럽은 산업혁명의 시기(1760-1850)를 거치면서 눈부신 기계문명사회로 발전되어집니다.
특별히 전기와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농업, 제조업, 운송업등 산업 전분야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납니다.
기계기술에 의한 생산의 폭발적 증가와, 빨라진 물품운송으로 부를 축적하는 도시 자본가들이 많아졌고, 도시민들의 생활수준
또한 크게 향상되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없이도 얼마든지 잘해나갈 수 있다는 장미빛환상에 빠져 들기 시작합니다.
결국 이런 시대사조가운데 유럽인들의 정신세계를 선도해나가는 신학과 철학도 성경 안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했던 기존의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대안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 대안은 바로 동양적 사고(思考)였습니다.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앞다투어 불교와 힌두교의 세계관으로 부터 새로운 답을 찾아 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사고를 중시하는 유럽인들에게 신비적 동양사상은 허무감과 절망감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성경에 계시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을 부정한 결과였습니다.
바로 지난 100년간 유럽의 철학사상을 철저히 교란시킨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와 니체의 허무주의의 본질입니다.

철학은 본질적으로 실존(實存)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찾기위한 탐구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람은 왜 태어나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 왜 먹고 마셔야 하는가? 왜 일해야 하는가?
왜 생식(生殖)해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지못하는 철학적사고들은 쇼펜하우어처럼 염세주의로 흐르거나 니체처럼 허무주의로 흐를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신앙은 본질적으로 인간다운 삶, 영생불사(永生不死)에 대한 갈망으로부터시작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인 성경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실존과 영적 갈망에 대한 해답서인 잠언서의 말씀은 이 모든 질문들 에 대해 이렇게 명쾌하게 대답해 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언 9:10).“

사람은 왜 태어나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 왜 먹고 마셔야 하는가? 왜 일해야 하는가? 왜 생식(生殖)해야 하는가?
인간실존에 대한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입니다.
세상에 태어나 먹고, 마시며, 일하며, 생식하는 이 수고가 허무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그저 단조롭고, 무의미하며, 괴로움만을
가져다주는 것인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인 성경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세상에서의 삶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사람에게 주신 크고 놀라운 축복의 선물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근거중의 하나가 창세기 1장 27절에서 31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창조주 하남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크고 놀라운 축복의 선물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축복입니다. 일하며 사는 것이 축복입니다.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가정을 이루는 것이 축복입니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이
축복들을 감사함으로 누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이 누림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것들을 사람에게 위탁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모든 것들을 감사함으로 누릴 뿐 아니라, 사람에게만 주신 특별한 지혜와 능력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아름답게 가꾸고, 하나님보시기에 아름다운 문화와 문명을 이룩해 나가야 합니다.
여기에 진정한 삶의 의미와 가치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이를 신학(神學)에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노동명령(勞動命令)과 문화명령(文化命令)이라고 칭합니다.

장로교 소요리문답 제 1번은 사람의 제 1되는 목적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진정한 삶의 의미와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것이며,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린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과, 하나님 기뻐하시는 문화와 문명을 이세상에 구현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말해서 세상을 하나님보시기에 아름답게 가꾸어나가는 그 자체에 진정한 삶의 의미와 가치가 부여되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소중한 사명의 완수를 위해 사람에게 <노동명령>과 <문화명령>을 주셨고, 이 소중한 사명의 완수를 위해
사람들에게 각양 은사 곧 다양한 재주와 능력들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의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일하며, 먹고, 마시며, 자식낳아 기를 수 있는 이 자체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축복의 선물인 것을 인정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제각기 삶의 영역에 충실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 다하며 동시에
기쁨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르고 성실하게 살면서 부지런히 일하여 그 열매를 누리고, 삶의 기쁨과 행복을 추구해나가는 이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고, 당신께서 친히 지으신 만물을 우리에게 위탁하신 목적입니다.
„하나님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창세기 2장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순응하는 자연인의 삶을 통하여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 기쁨으로 그 수고의 열매를 누리게 될 때 우리에게 온전히 성취되어집니다.

그렇습니다. 부지런히 일하고, 기쁨으로 먹고 마시며, 대를 이어나갈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이일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축복의 선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대한 순응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모든 과정들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큰 축복이요 낙인줄 깨달아 아는 이것이 진정한 삶의 지혜입니다(전도서 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참지혜>란 진정한 삶의 의미와, 진정한 삶의 기쁨과, 진정한 삶의 낙이 무엇인지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이 무엇이겠습니까? 진정한 삶의 의미와, 진정한 삶의 기쁨과, 진정한 삶의 낙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서
사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주신 그 많은 것들을 누리면서도 삶의 기쁨과 낙이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그 모든 것들을 감사함으로 누리며 사는 것이 자연인의 본분이요, 그 자체에 삶의 의미와 가치가 부여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전도서 5:18-19).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부지런히 일하며 애쓰고 수고하는 만큼 누림을 얻는 세상, 배불리 먹고 마시며 즐거워 하는 세상, 후대를 이어갈 자식을 낳아
기르며 기쁨과 보람을 추구하는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좋은 세상입니다.

노동을 천히 여기고, 먹고 마시는 일을 천히 여기고, 자식낳아 기르는 일을 천히 여기며 가급적 고통스럽게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 최대한 고통을 가함으로써 삶의 낙과 단절을 꾀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허락되어진 모든 누림과 낙을 스스로 박탈함으로써 자연인의 한계를 초월 하는 보다 고차원적인 삶의 경지 곧 인간해방에
이르겠다는 것입니다.
유교는 육체노동을 천히 여기고, 불교는 먹고 마시는 일을 천히 여기고, 힌두교는 자식 낳아 기르는 일을 천히 여깁니다.
노동에 대한 욕구를 죄악시하고, 음식에 대한 욕구를 죄악시하고, 이성에 대한 욕구를 죄악시하는 이같은 사고는 인간실존에
대한 부정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대한 무모한 도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같은 사고는 기독교의 금욕주의(禁慾主義)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기독교의 금욕주의는 인간실존에 대한 긍정을 바탕으로 하며,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주신 삶의 누림들을 이상적으로 관리해
나가기 위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의 금욕주의는 부도덕한 향락을 금하고, 사치성 소비를 억제합니다. 하지만 노동을 신성시하고, 노동의 열매로서
획득하여 누리는 부(富)를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로 간주합니다.
또한 기독교의 금욕주의는 노동을 최고의 금욕수단으로 여기며, 거듭난 신앙인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앞에 입증해 보여야 할
참된 신앙행위로 간주합니다.

일에 대한 욕구, 음식에 대한 욕구, 이성에 대한 욕구는 결코 천박하거나 부도덕한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정상적이고도 건강한 자연인의 욕구입니다.
일에 대한 열정, 먹고 마시는 즐거움,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반려자와 아이낳아 기르며 오손도손 살아가는 삶의 기쁨,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주신 사랑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누릴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같은 자연인의 욕구들을 부당하며, 추하고, 악한 것으로 간주하는 종교적 관념들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이같은 종교적 관념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같은 욕구들을 애써 억제할 뿐 아니라, 스스로 신체에 가급적 많은 고통을
가함으로써 자연인의 이 모든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한국의 어떤 스님은 도를 닦기 위해 십년간이나 누워 잔 적이 없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역시 도를 딱기 위해 일부러 맛없는 음식을 먹는 수도자들도 있습니다.
옛날 인도의 수도자들은 일부러 짐승의 오줌을 들이켰고, 가시나무로 만든 요위에서 잠을 잤습니다.
이같은 부질없는 관념과 행위들은 인간실존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유럽의 염세주의, 허무주의 철학은 인도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불교의 뿌리인 인도의 <부라만교>도 불교도 삶의 현상을 형벌이요 고통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인간본래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 형벌에 철저히 순응하여 세상즐거움과 낙을 멀리하는 금욕생활을 해야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주신 삶의 기쁨과 낙과 모든 누림들을 천시하고 죄악시하는 이 모든 부정적 사고들은 사탄의
술수입니다.
그렇지않다면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잘못된 것으로 간주되어지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땀흘려 일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각양 식물들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의 욕망도 죄요, 타락으로 간주되어지지
않겠습니까?
자녀를 생산하여 세상을 가꾸어나갈 후손을 남기라는 하나님의 분부도 결국 부당한 것으로 간주되어지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친히 조성하신 세상만물과 당신의 창조질서에 순응하는 피조세계의 역동성을 보시며
심히 기뻐하시고 만족해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세기 2:31)“

무슨뜻 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자연인의 살아가는 그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도 좋았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하는 즐거움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하나님께서 철따라 고장따라 여러 모양으로 주시는 과일이며 채소며 곡식들을 맛보는 즐거움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남녀가 사랑으로 가정을 이루어 자식낳아 기르며, 오손도손 살아가는 즐거움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연인의 삶이요, 이런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축복의
선물입니다.

노동을 천히 여기고, 먹고 마시는 일을 천히 여기며, 자식낳아 기르는 일을 천히 여기는 이 같은 종교적 관념은 곧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대한 거역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기독교안에도 왜곡된 금욕주의가 있습니다.
역시 사탄의 술수입니다(디모데전서 4:1-5)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迷惑)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것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랄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니라.“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탄의 거짓말에 속고 있습니까?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스스로를 보수적이며 복음적 신앙인이라고 믿고있는 한 어머니가 성년이 된 딸을 출가시키면서
남편과의 동침은 오직 아이를 갖기 위한 목적으로만 하도록 당부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신앙교육에 잘 순응했던 이 딸은 어머니가 시키는대로 했고, 그 결과 이 딸의 가정은 아이를 셋이나
낳고서도 파국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이 어머니가 딸을 이렇게 교육시킨 것은 아이를 갖기 위한 목적이외의 남녀간의 동침은 비록 부부간이라 할지라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는 왜곡된 기독교의 금욕주의 때문 이었습니다.
음식을 가리고 남녀관계를 부도덕시한다 해서 사람이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거룩한 삶은 한편으로는 세상의 죄의 문화에 동화되지 않은 정결한 삶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삶은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온전히 순응하는 자연인의 삶이기도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맞는 삶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부부사랑에 대해서 잠언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 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같고, 아름다운 암노루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잠언 5:18-19).“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가운데 행하기를 기뻐하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많은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의 열정에 걸맞는 복을 누리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생각은 각자의 소유와도 관계됩니다. 소유한 것이 많지 않으니 그만큼 복도 적게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만물을 이미 사람에게 다 주셨습니다.
마음껏 누리며 삶의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도록 이미 다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창세기 1:27-29).“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곧 영육간의 <누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누림은 소유의 많고 적음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가진 것이 많다고 가진만큼 많이 누리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다른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많은 것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고통과 절망속에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불행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다 받아 누리면서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각자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회구성원의 한사람으로서 자신의 생업에 충실하면서 나름대로 성실히 그 역할을 감당해 나오지 않았 습니까?
그리고 그 소득으로 먹고 마시며 노동의 보람과 휴식의 기쁨을 만끽하지 않았습니까?
또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낳아 기르면서 오손도손 재미있게 살지 않았습니까?
바로 의미있는 삶, 가치있는 삶,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 산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받은 복이요, 받아누린 복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과수원주인이 인부들을 고용해서 과수원 땅을 파 뒤집게 했습니다.
인부들은 땀을 뻘뻘흘리며 온종일 이일을 했습니다.
저녁이 되자 과수원주인은 인부들에게 품삯을 지불하면서 다음날도 와서 같은 일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과수원주인은 인부들에게 전날 그들이 힘들게 파 뒤집은 땅을 다시 파 뒤집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부들은 속으로는 의아했지만 그래도 시키는대로 했습니다. 저녁이 되자 과수원 주인은 다시 동일한 품삯으로 인부들에게
지불하고서 내일도 나와서 일을 해달다고 했습니다.
주인의 부탁대로 다음날도 인부들은 나와서 주인의 새로운 지시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과수원주인은 전날 재차 파 뒤집은 땅을 또다시 파 뒤집으라고 지시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인부들의 마음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과수원주인이 인부들에게 단지 품삯을 주기위한 목적으로 불필요한
일을 반복해서 시키고있는 것으로 보여졌기 때문입니다.
할 수없이 시키는대로 하긴 하면서도 온종일 그들의 마음속에는 노동의 기쁨과 보람이 없었습니다.
저녁이되어 인부들은 또다시 하루 품삯을 받았지만 그들의 마음은 기쁘지않았습니다.
그런데 과수원주인이 인부들에게 내일도 와서 또 일을 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인부들은 아무리 돈받고 하는 일이래도 매일처럼 무의미하게 이미 파헤친 땅을 또다시 파헤치는 이런 일을 더 이상은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말을 들은 과수원주인은 매일 이처럼 거듭해서 과수원 땅을 파엎게 하는 이유는 바로 고갈된 흙의 지력을 되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그제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된 인부들은 다음날 다시 나와서 이전보다 더 부지런히 땅을 파엎었습니다.
그렇게 해야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삶의 의미를 바로 알게 되면 그만큼 가치있는 삶을 추구해 나가게 됩니다.
삶의 의미와 삶의 가치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잠언 3:13).“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응하여 자연인의 본분(하나님의 창조목적)에 충실하게 될 때에 이에 수반되어지는 모든 낙을
누리게 되어집니다.
그리고 누리게 되어지는 낙은 구체적으로 일하는 즐거움과, 먹고 마시는 즐거움, 자식낳아 기르는 즐거움과,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즐거움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특별히 심령의 낙이 더하여 집니다.
그것은 죄문제를 해결받은 자의 심령의 기쁨입니다.
그것은 영생불사의 삶을 허락받은 자의 심령의 기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되어진 자의 심령의 기쁨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낙원에서 주와 더불어 영원히 왕노릇하도록 선택되어진 자의 심령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소유한 다윗은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 23:1).“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소중함은 말씀안에서 사람의 본분과 도리를 배워 온전히 알게 되며,
말씀안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배워 온전히 알게 되어, 하나님 허락해 주시는 삶의 기쁨과 행복을 얼마든지 받아 누릴 수
있게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전도서 5: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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